[백건은찬] 좋은 날

카테고리 없음 2014. 10. 5. 21:10
잠이 올 것만 같아. 그리 느껴질 만큼 날씨는 좋았다. 하늘은 새파랬고 따뜻한 햇살에 적당히 부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또 한 가지. 날 뒤에서 감싸 안는 듯 앉아있는 녀석이 문제였다.

" 저기, 백.건.씨? 손이 어디로 가시는지. "

후드 안에 침입하는 손을 잡아 채고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녀석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의 숨결이 귀에 바로 느껴져 기분이 미묘했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바로 귓가에 말을 속삭였다.

" 어디긴. 내가 애인 몸도 제대로 못 만져? "
" ..... 그 애인이기 전에 내 몸이야! "

간지러움과 비슷한 느낌이 내 몸을 지배하는 느낌에 붉어졌을 귀를 손으로 감싸며 녀석에게 기댔던 몸을 일으켜 녀석에게 소리쳤다. 역시 내가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귓가에 얘기한 것이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만 너무 속 껍질까지 벗겨진 부끄러운 느낌.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래된 친구의 스킨십은 쉽게 능숙해질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몸이 이끌리는 힘에 놀라 정신을 차리니 녀석이 자신을 다시 기대게 만들었다.



멍한 기분에 반항도 안하고 있으니 볼에 느껴지는 따뜻한 입술의 감촉.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 연속으로 내 볼에 입 맞추는 녀석. 기분 좋아.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각이 들 때 나와 눈을 마주치고서 내 눈에 입을 맞춘다. 그 다음은 코 그리고 그 다음은.

좋아.

녀석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기 전 입술에 느껴지는 녀석의 입술.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 이 녀석과 나밖에 없는 듯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우리에게 와 닿았을 뿐.

행복하다는 따뜻한 무언가가 가슴에 새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백건은찬] 달빛

카테고리 없음 2014. 10. 4. 14:40

백건이 기억을 잃었다. 날 알아보지 못 한다. 오히려, 날 피하기까지 한다. 답답한 숨을 들이마셨다.


"안녕, 백건."

"....."


흘깃 쳐다보고선 날 지나쳐 간다. 난 날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지었던 웃음을 멈추었다. 답답해. 나 답지 않은 짜증섞인 속마음에 한숨을 지었다.


"주은찬. 밥 먹어."


방문틀에 드러누워 새 하얀 구름들을 감상하고 있던 와중에 청룡 가람이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가람이의 밥은 맛있었다. 그 입맛 까다롭다는 백건의 입에 맞을정도로.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이 날 살짝 흔들었다. 날씨는 한숨이 나올정도로 좋았다. 나와는 다르게.


밥상에 앉아 맛있는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씹고 있다가 앞에 앉아있는 백건을 흘깃 쳐다보았다. 방금 와서 앉아서 그런지 다들 이 녀석이 식사를 시작하지 않은 걸 모르는 눈치다. 손을 뻗어 고기접시를 들어 백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모두 날 쳐다본다. 부담스럽게 뭘 보냐고, 실실 웃었다. 백건이 날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곧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어들어 먹는 백건의 모습을 보고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게 기회라는 게 아닐까. 혹은 하늘이 내게 내리는 벌. 같은 사신주제에, 남자주제에 너를 마음에 둔 죄에 대한.



꽤나 깊어진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백건이 나타난 그 날 부터, 쭉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눈을 감아보아도 수면의 늪에 빠질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고싶어 누구도 깨어있지 않는 시각이 되면
마루로 조심스레 나가 달을 찾았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라고. 네게 남은 희망같은 건 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지, 이런 핑계같은 생각조차도 널 생각할 구실이라는게.



그래, 나는 솔직한 사람이 아니였다. 그 누구처럼 마음 속 한마디를 쉽게 꺼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겁쟁이, 나는 겁쟁이였다.

무릎을 감싸 안았다.

중앙, 이 곳에 오기 전 나는 너의 연락을 피했다. 시간을 두고 널 멀리하자고, 어린시절 너희집에 널 보러 부지런하게 걸음을 재촉하던 어린 날 붙잡아 가지 못하게 해버리자고 그렇게 이 마음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너, 안 자나?"


움츠렸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네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밤, 오로지 달빛만이 세상을 비추고, 널 비추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습관처럼 웃었다. 실실웃는 날 보던 넌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또 바보같은 심장은 네 존재에 더욱 두근거리고 있었고 난 그 두근거림을 숨기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 잊어버린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하나, 평소의 너라면 이토록 이상하게 행동하는 나에게 "너 뭐 잘못 먹었냐?" 라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내겠지. 그래.


"너, 날 알고 있다고 했지?"


부드럽지는 않지만 충분히 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 몸을 움츠려 무릎을 더욱 더 감싸안으며 작게 "응. 그런데?" 라고 답해주었다.


"그럼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가르쳐 줘."


사람? 누군가 기억나려는건가. 난 끄덕였고 백건은 그 사납지만 지금은 지극히 조용한 눈매를 한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나타나 내 앞에서 웃어줬으면 하는 사람."


어조는 잔잔했다. 다만 그 말을 하는 백건의 눈동자는 굉장히 집요한 사람의 그것이여서 난 조금 놀랐다. 지금 백건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사람이 백건에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렸다.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겼구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슴이 지끈거렸다.

지금 내 표정, 이상하진 않을까? 습관처럼 지었던 웃음이 제발 어색하지 않기를 바라며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것 말곤? 한 가지로는 잘 모르겠는데."


내 대답에 녀석은 날 보던 시선은 거두고 이제는 달을 향해 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샌가 그 옆모습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나는 네 얼굴을 바라보다 눈동자만 움직여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넌 그걸 알고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네 그 눈빛은 내 숨겨진 그 마음 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을.


"잡고 싶어도, 계속 잡을 수가 없는 사람. 내게 저 '달' 같이 언제나 그 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어린시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너는 내 질문에 걷던 걸음을 멈춰서선, 날 보며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바보]


그 당시에는 그게 내가 한 질문의 쓸데없음을 비난하고자 내게 던진 귀찮음을 담은 한 마디인 줄 알고 실실 웃으며 그런 농담은 이제 너무 많이 들었다며 먼저 저 만큼 걸어가버린 녀석을 쫓아갔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내가 내 마음을 자각할 시기즈음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단어 하나가 불연듯 내 머리속에 숨어지내다 나타났다는게, 난 네 모든 걸 기억하고 생각하려 했다는 것을.. 아니 난 빼도박도 못 하게 널 좋아하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바보."

"... 뭐?"

"네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 준 좋아하는 사람이랬어, '바보'가 ."


아닐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 사람을 찾지 않았으면 하는 내 조그만 심술.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그걸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야? 아려오는 가슴에 이제 난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도망치자. 그래, 얼른 너에게서 도망치자. 침을 삼켰다. 네가 무엇을 더 말하기 전에, 네가 내게 더 비참함을 안겨주기전에 이제 들어갈거라고 너도 얼른 자라고 말하자.



"그럴지도 모르겠네. 바보."


조금 즐거운 듯한 음색으로 내게 그 어린날의 그 때처럼 너는 바보가 좋다고 말한다.









"야, 바보 주은찬. 거기 쓰러져있으면 쓰레기수거함이 주워간다? 일어나."


무지막지한 녀석. 이마에 난 혹이 아렸다. 여유롭게 내 이름을 부르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백건의 기억이 돌아왔다.



녀석의 기억이 돌아오던, 돌아오지 않던 내 불면증은 고쳐지질 않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녀석은 이제 나를 없는사람 취급도, 싫어하는 내색을 내보이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내가 걱정했던 그런 날이 와 버렸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집중 할 수 없는데. 아직 나는 이 마음의 한 자락도 끝내질 못 했는데. 더 커져만 가는데.



"바보 주은찬."

".. 어? 안 자고 왜 깨어있어?"

"네가 할 말이냐."



그 때 이후로 마루에는 아주, 아주 늦은밤에만 나왔었다. 그것도 매우 드믈게. 그래서 밤에 그 녀석이랑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근데, 오늘 만나버렸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요새 상당히 거슬리는 한 가지를 떠올리며 녀석을 불렀다.



"야. 백건."

"왜? 바보 주은찬."


또.



"왜 내 이름앞에 바보를 넣는거야? 진짜 바보의 저력을 보고싶은거냐."



바보,바보,바보. 기억이 돌아 온 그 순간부터 계속 바보라고 부른다. 이쯤되면 고의로 부르는게 틀림 없었다. 녀석은 내 질문에 피식 웃었다. 달빛이 만들어낸 얼굴의 음영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평소의 메마른 웃음이 아닌 무언가를 담은 부드러운 웃음이라는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보 맞는데. 바보 주은찬. 네가 말한것도 잊어먹냐?"

"내가 말한...."


그 때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기억나는 한 장면.






["네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 준 좋아하는 사람이랬어, '바보'가 ."]








[건찬람] 주은찬 임신사건 글 넷캔 ( 몽거 파이 나비 홍단 )

카테고리 없음 2014. 10. 4. 00:42


빨강색 - 몽거님 / 파란색 - 파이님 / 노란색 -나비님 / 자주색 - 홍단 




사건은 갑작스럽게 전개되었다. 주은찬이 우읍, 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에 나머지 세 명이 놀란 토끼눈을 뜨고 은찬을 바라보았다.

“주작공자?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아...아니, 괜찮은데.”

현우가 목소리를 내는 동안 둘의 시선은 공중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맞부딪혔다. 설마,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은찬을 바라보던 현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밥을 먹던 숟가락으로 은찬을 가리키며 눈치 챘다는 듯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청룡 공자의 밥이 맛이 없어서 맞죠, 주작공자!”

몇 초간 폭주한 한 마리의 용의 침착한 살인 현장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어째서 인지 피가 묻은 손을 씻고 돌아온 가람이 자리에 앉았을 땐 쓰러진 현우는 이미 방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너희도 벼락 맞고 싶어? 청가람의 질문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은찬은 조용히 그의 눈치를 보며 묵묵히 숟가락을 떴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식탁에 마련된 반찬을 집어 입속에 넣었지만 다가오는 것은 구역질이었다. 윽, 하고 주은찬이 앓는 소리를 내자 두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야, 주은찬. 너 진짜 괜찮은 것 맞아?”

“어, 어. 괜찮은 것 같은데.”

은찬이 생각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자 백건은 은찬의 옆에 바짝 다가갔다. 손을 들어 은찬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해 이마를 맞대었다. 그 순간 옆에서 심상치 않게 노려 보고 있었던 가람이가 숟가락을 쾅 식탁에 내리쳤고 그에 깜짝 놀란 은찬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윽...잠시만 물좀.”

“ 야 청룡. 애가 놀랬잖아? 왜 갑자기 애꿎은 숟가락을 치고 난리야?”  

“그러는 너는 왜 애 얼굴을 가져다 들이미는데? 누구 보기 좋으라고.”

“왜 이런 일 가지고 네가 뭐라뭐라 하는 건데? 주은찬이 네 애인이라도 되냐?”

말하는 백건도 입이 목구멍에서 걸려서 한 번 걸러지는 느낌이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셋의 기억 속에서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뻔뻔한 낯짝으로 애인이니 뭐니 들먹여? 가람의 숟가락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은찬이 다시 한 번 딸꾹질을 하는 소리에 숨을 골랐다. 참자,

처음부터 저 자식은 마음에 안 들었어. 속으로 몇 번이고 백건을 욕하며 감정을 추스리던 가람은 다시 한번 들려오는 은찬의 구역질 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괜찮다 괜찮다 말하던 것이  거짓말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야 주은찬 너 왜 그래. 당황한 가람의 목소리에 백건도 그제서야 은찬을 돌아보았다. 하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새하얗게 뜬 얼굴로 잘게 떨리는 손을 숨기며 말하는 모습에 가람은 인상을 쓰며 은찬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디가 문제인지 알아야 해결할거 아니야, 멍청아!”

“청룡의 말이 맞아. 너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해.”

“속이 좀 안 좋아.”

주은찬은 끝내 메스꺼움을 이기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손으로 계속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막으며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주은찬은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 본 둘은 주은찬의 뒷모습을 한번 살피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저거, 혹시. 백건은 화장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에 인상을 썼다.   

“..으윽…공..공자들 제가 언제 잠이 들었던 거죠..?”

방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현우를 보고 가람과 건은 ‘ 아 . 까먹고 있었다. ‘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주은찬이었다. 계속 화장실을 주시하고 있으니 마당 쪽 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아 할머니께 물어보면. 조금 있다 정말 창백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나온 은찬이를 할머니 앞에 데려간 가람이는 단호하게 물었다.

“ 할머니., 주은찬 임신인 것 같아요.”

오히려 가람의 질문에 놀란 것은 할머니가 아니라 은찬이었다. 방금까지 속 안에 있던 것을 게워냈으면서도 은찬의 얼굴은 다시 홧홧하게 불타오르면서 가람의 소매를 죽 잡아당겼다. 하지만 가람은 은찬을 돌아보지도 않고 할머니만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가람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는 은찬의 팔을 가져다가 맥을 짚어보았다. 분명 남자아이의 몸일텐데도 맥의 안쪽에서 두 사람 분의 박동이 느껴졌다.

“할머니, 진짜에요? 주은찬 임신했어요?”

이 와중에도 백건은 눈까지 빛내가며 할머니에게 대답을 보챘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은찬은 남자의 몸으로 임신이 가능한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할머니는 은찬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주작의 양기 때문이로구나”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 셋에게 할머니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도 알다시피 보통 주작가에서는 주작의 양기를 버티기 위해 여성이 후계자가 되는게 일반적이었지. 하지만 은찬이는 특수한 케이스였잖니. 주작의 양기와 은찬이의 양기가 부딫혀서 몸에 일시적인 여성화가 찾아온것 같구나. 자신의 설명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열정적인 강의를 펼치던 할머니는 잠시 말을 끊고 진지한 얼굴로 셋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얘를 임신할 법한 일이 있니?”

말문을 트지 못하는 청가람을 한번 본 백건은 입을 열었다. 잤어요, 주은찬하고. 그 말에 앞에 있던 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가람은 저 미친놈. 말을 하면 어떡하나, 라고 생각하며 난처한 얼굴로 할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스러운지 눈만 동그랗게 뜬 할머니는 헛기침을 하며 둘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후계자들과 함께 해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구나. 너희가 어린 마음에 그랬을 수도….”

“어린 마음에 그런 거 아닌데요.”

백건의 단호한 일갈에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고 은찬은 어쩔 줄 몰라하며 할머니와 백건을 보다가 나서려다가 가람이의 한마디에 또 경악을 하고 말았다.

“ 주은찬, 저랑도 잤는데요? “

옆에서 듣고만 있었던 현우는 경악이 서린 눈빛으로 셋을 바라보았고 은찬은 가뜩이나 안 좋은 상태에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백건이 단숨에 한 팔로 은찬의 몸을 잡았고 한 걸음에 달려온 가람이가 백건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 주은찬, 내 거야. 손 떼. “

“이 자식들아… 둘 다 손 떼, 나는 내꺼야.”

둘이 은찬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가도 사이에 낀 은찬의 한 마디에 곧바로 팔을 놓았다. 은찬은 아직도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홧홧해지는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면서 둘의 마주하려고 드는 시선을 피했다. 가람의 잠꼬대를 못 참겠다며 이불로 둘둘 말아 청 테이프로 감기까지 한 백건이 가람을 그대로 싸 들고와서 은찬에게 여기다가 청룡 던져 놓고 네가 대신 오라던 말에 쫄래쫄래 따라간 것이 화근이었던 그 날의 일을. 바닥에 던져 놓는 바람에 잠에서 깬 가람이 옆방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문을 열었고, 백건이 힘으로 은찬을 누르면서 야금야금 깨물어먹고 있던 그 모습에 가람도 동해서 덩달아 달려들던 때의 얼굴을.

정신없이 달려들던 둘에게 미약한 저항을 해 보았지만, 은찬으로써는 역부족이었다. 처음에 백건이 물기 시작할때부터 그냥 도망쳐야 했던건데. 뒤늦은 후회를 해 보았지만, 늦은 밤 짐승으로 탈바꿈한 백건과 가람은 그 날 저항하는 은찬을 수 차례 범했고, 결국은 은찬또한 종국에는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개월후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임신이라니. 전혀 예상도 못했다고. 은찬은 제 눈 앞이 캄캄해 지는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큰 블랙홀이 있다면 분명 주작으로 태어나 중앙에 오게 된 것이리라.

“저 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 너희들도, 따라 오지 마.”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 밤의 책임은 저에게도 있었고 제일 중요한 일은 자신의 뱃 속안에 있는 생명체에 대한 결론이 아닐까. 정말, 이 뱃속 안에 아기가 살고 있는 거야? 조용히 현우와 자신의 방으로 홀로 들어간 은찬은 벽에 기대어 있다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아직 티도 안나는 평평한 듯 아니 조금 나온 건가 착각이 드는 배를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의 아빠가, 아니 물론 나도 아빠지만 정자는 그 두 녀석 중 하나의 것이겠지. 둘의 성격으로 보아 이 아이도 분명 한 성격 할 것 같은 상상을 하고 만다. 아 아이야, 제발 성격 만큼은 날 닮아줘. 외모는? 음. 솔직히 둘 다 보통사람 보다 뛰어난 외모라 차마 자신을 닮으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내 배가 열 달이 아파서 낳는 아이일테니 자신이 책임을 지기는 해야겠다. 그리고 1년 가량을 품고 있는 아이에게 설마 모성애가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 잠깐만. 모성애? 부성애인가, 이건? 엄마인지 아빠인지 고민을 하다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절망스러워서 은찬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인간 세상에서 없는 사람일 텐데, 그러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갑자기 엄마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은찬은 18살의 나이로는 하기 이른 고민에 휩싸였다. 결국, 나랑 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누구야? 백건, 아니면 청가람?

그 둘은 분명 서로가 자신의 아이라고 우길 것이다. 은찬은 쓴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배를 어루어만졌다. 네 아빠가 되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겠다 너는. 적어도 우리보단 사랑받고 살테니까. 은찬은 잠시 고민을 하다 결심한 듯 방 문을 열어 젖혔다. 하지만 그 밖의 풍경을 본 순간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 당황해버렸다.. 평소라면 절대 누군가에게 자신을 굽히거나 하지 않던 두명이 자신이 있는 방 문앞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지금 뭐, 하는거야? 당혹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은찬의 목소리에 묵묵히 앉아만 있던 백건과 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책임질게.”

“우리도 둘 중 누구인진 모르지만, 적어도 책임이 같이 있다는건 알아. 그러니까,”

또 혼자 끌어안고 가지 말고 차라리 결정하지 못하겠다면 둘 다 함께 끌어안고 가. 짤막한 백건의 한마디와 그 뒤를 잇는 가람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자신들은 이야기를 끝낸 것 같아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너희들도 참 바보같지. 어떻게 이렇게 매력 없는 나같은 녀석한테 붙잡혀 버린건지. 아마, 나는 언제 어느 시점 어디에서라도 또 비록 주작이 아니였더라도 너희를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정신없이 빠져들었을 것 같아. 여러가지 탈도 많았고, 웃음도 많았던 시간들이 이제는 내겐 소중해. 그리고 지금 내 안에 있는 작은 생명체도 무척 소중해질 것 같아.

“ 솔직히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 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마음을 다잡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중에 이 아이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알게 되겠지만.

“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아이야. 너희들이 나를 책임진다면, 역시 이 아이도 누구의 아이든 상관없이 소중히 해줬으면 좋겠어. 이 아이가 미움받거나 외면당하기엔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잖아? “

난 담담하게 둘의 얼굴을 번갈아서 내려보았다. 진짜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버거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둘은 내 말에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 고마워” 라고 말하며 둘 앞에 쪼그려 앉아 웃어주었다.




[가람은찬] 하얀세상

카테고리 없음 2014. 10. 3. 19:20

W.홍단



1.

눈이 내렸다. 손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닿는 눈들이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눈이다. 나와는 마냥 다른 것 같은 눈. 내 시야안에 펼쳐지는 하얀세상에 나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차가운 공기를 느끼기도 잠시 조금 기침이 나와 몸을 움츠렸다.

"주은찬 들어와. 거기서 뭐하는 거야."

건아. 난 이 하얀세상을 만끽할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에 웃음지으며 움츠렸던 몸을 일으켰다. 자는 줄 알았는데 깨어 있었네? 라며 말을 걸면 내가 잠만 자는 줄 알아요. 라며 퉁명스럽게 내 머리에 살짝이 내려앉은 눈을 털어낸다.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건아, 라고 불러봤다. 너는 왜? 라며 반문했고 나는 이 눈은 언제 멈출까? 라며 물었다. 저 새 하얀세상이 끝나고 해가 나와, 모든 것을 녹이고 움츠렸던 생명에 기운을 불어 넣어주고 모두가 그 태양의 따뜻함을 받는걸까. 넌 대답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멈출 때가 되면 멈추겠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처럼 그 애도 그렇게 끝났으면 좋을텐데. 백건에게 고맙다고 툭 어깨를 쳤다. 넌 가라앉은 눈길로 날 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


" 너, 어떻게. "


난 분명히 죽었을텐데. 내가 어떻게 네 앞에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거야? 가람아. 난 지금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람이는 그저 슬픈 눈으로 나를 꼭 안았다. 눈물이 저절로 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러면 안 되는거 잖아. 순리를 거스르면 안 되는거 잖아. 그 순리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 차마 말 할수가 없었던 건 가람이의 그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날 너무 아픈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이였어.넌 누구보다 배려심이 깊어서 지금 내가 널 만난 것 보다 너에 대한 걱정으로 이러는 걸 잘 알고 있잖아.


" 나에게 너마저 뺏어가는 건 버틸 수가 없었어. "


다시 되살아나는 게 가능한가, 이런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날 되살린 가람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평소처럼 날 대했다. 과거로 돌아온거구나.



3.


" 이번엔, 그러지 마. "


내가 그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받은 건, 23살의 겨울이였다. 내가 되살아난 과거는 22살의 겨울. 결국 또 똑같은 굴레였다. 내가 병에 걸려서 네 앞에서 죽어갔고 너는 그걸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도 그 아파하는 얼굴이 싫어 바보같은 짓을 반복했다. 네 곁에 있고 싶었다. 네가 웃는게 좋았다. 하지만 이건 그래선 안 될 일이였다. 나는 죽기 전 가람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고했다. 이번에는 진짜 작별을 하자고. 너는 똑같이 그 고운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분하다며 소리쳤다.


" 왜, 왜 너는 죽어야 하는건데! "


아냐. 왜 내가 죽어야하는게 아니라, 운명이 그랬던 거야.



4.


" 그만. 그만해, 주은찬!! "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 난 내 목에 들이댄 칼을 거두지 않았다. 이젠 떨림조차 없어. 나는 경고했다, 더 이상 내게 오면 그대로 목에 이 칼을 쑤셔넣을거라고. 내가 가장 두려운게 뭔지 알아? 내가 또  몇천번이나 이 굴레를 겪으며 그 암습하는 고통을 인내하며 죽어가는 거? 사랑하는 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거? 아니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 ..이제 놓아줄테니까.."

"...."

" 자살같은 거 하지마. "


그 순리를 거스른 네가 나 때문에 해를 입는 것 그거 하나 뿐인데. 



5.



주은찬이 죽었다. 고치지 못할 병이란다. 그것도 1년밖에 시간이 없었더랬다. 옆에 있는 청룡은 그 주은찬이 자살하겠다고 칼을 가지고 살벌하게 난리치는 날엔 그렇게 울더니 정작 장례식장, 주작답게 화장을 하던 그 순간에는 눈물 한 방울 떨어트리지 않았다. 모두가 울던 그 순간에, 나도 주은찬이 불쌍해 울던 그 순간에도 청룡은 그렇게나 슬픈 얼굴을 하고서는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서 있었다.

[백건은찬] 자살 (for. ari님)

카테고리 없음 2014. 10. 2. 22:47

아. 쟤가 그 잘못 태어났다던 그 주작 후계자?

새로운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를 드리러 방문 손잡이를 돌려 거실로 나왔을 때 들려오는 내 귀를 찌르는 듯한 아픈 한마디. 날 원숭이를 관찰하는마냥 그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새까만 눈동자. 무섭다. 하지만 난 주작 후계자야. 침을 삼키고 그 손님쪽으로 걸음을 옮겨 몇 번이나 연습해 이제는 익숙한 미소를 지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주은찬입니다. "



주은찬. 나를 부르는 백건의 목소리. 생각에 빠져있었던 탓인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아, 왜? 백건은 내 정신사나운 모습에 말없이 날 보더니 머리를 한대 툭 치고 날 지나쳤다.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뭐라 말 할 새도 없이 자기반으로 가버린 백건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티가 나는걸까.

" 빽건, 오늘 같이 놀러가자! "
"....뜬금없이 웬. "

하교시간, 끝나자마자 백건의 교실로 달려가 같이 놀러가자 말을 건넸다. 내 급작스런 권유에 놀란 기색. 매일 하교 후 중앙에 돌아가면 해야하는 수련을 농땡이 치겠다는 소리인 걸 바로 알아들어서 일지도. 난 오늘 놀돈은 내가 내준다며 지갑을 꺼내들으며 웃었고, 아 갑부 앞에서 이건 좀 오버였을까, 살짝 후회가 들기 시작했을 때.

" 좋아. 졸부 주은찬이 돈을 어디까지 낼 수 있는지 궁금해졌어. "

졸, 졸부. 말 참 예쁘게 하네. 내 이마에 빠직마크는 우습다는 듯, 내 머리를 한 번 툭 쓸어넘겨주고선 먼저 밖으로 나선다. 난 그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작게 요동치는 가슴에 쓰게 웃어버렸다. 후, 크게 숨을 들이내쉬곤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오자 이미 저 멀리까지 걸어가버린 백건의 뒷모습이 보였다.

" 백건, 같이 가! 너 어디가는지는 알고 가는거야? "

달려가서 들은 대답은, 네가 있을텐데 그게 필요해? 난 그만 웃어버렸다. 난 어쩌다 이렇게 뻔뻔한 백호와 친구가 되었을까. 내 생애 두 번 다시 없을 기이한 일이라며, 백건의 팔을 잡고 하교길의 그 아늑한 석양빛이 가득한 길로 이끌었다.


" 즈 픕큰 드르! "

먼저 내가 백건을 끌고 온 곳은 근처 시내의 영화관, 정말 오랜만에 오는 거라 나도 많이 바뀐 영화관 내부를 구경했다. 대강 볼 수 있을만한 유명한 영화티켓을 사고 촉박한 시간임을 알기에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기울이면 와르르 내용물이 쓰러질 것 같은 팝콘, 차가운 콜라 두개, 입에 문 티켓 두 장. 위태롭게 이 셋을 들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게 확실할텐데 자 팝콘 들어 라는 어그러졌지만 분명한 외침을 못 들은 척 하는 거야! 발을 들어 백건의 다리를 살짝 힘을 들어 차버렸다. 퍽. 주변을 둘러 보고있던 백건이 훽 나를 돌아본다. 오 효과 좋은데?

" 주은.. ."
" 어짜피 안 아프잖아? "

그렇다고 내 다리를 차? 네가 지금 나와 한 판 뜨고싶구나 라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아야했지만, 난 얼른 건이의 품에 팝콘을 안겨주고 극장 안의 시계를 보고선 아 늦겠다! 라며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내가 안 오느냐는 듯 팝콘을 들고 멈춰 있는 백건을 보니 그 자리에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아, 서둘러.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 왜 가는 건데? ]

영화 속 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이 자신의 일과 집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선 떠나려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친구에게 주인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여긴 내 자리야. 하지만 이젠 내 자리가 아닌 걸 알아버렸어.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봐도 바꿀 수가 없는 것중 하나였고. ]

친구로썬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말. 사실 이 영화내용은 주인공이 차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는 걸로 시작하는 스토리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3개월 전 자신의 방. 더불어 자신의 주변도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가족, 짝사랑하는 사람. 친구들, 학교 그 무엇 하나. 처음엔 자신이 꿈을 꾼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신을 제외한 주변에서 하나씩 위화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 잘 지내. 언젠가 또 만나게 된다면 다시 친구하자. ]

그 말을 끝으로 주인공은 돌아선다. 주인공이 정말 떠난 이유는 그 위화감을 시작으로 주인공 자신이 자신의 사람들 속에 녹아 들어가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은 공간, 같은 주제의 대화, 같은 웃음 그 모든 게 같았지만 자신만은 다른 시간의 사람인 듯 낯설음을 느끼게 되었고 3개윌 뒤 자신의 기억과 비슷한 차사고를 당할 뻔한 이후로 주인공은 그 사고가 꿈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모두가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어서 울기도, 화를 내보기도 그 사실을 잊은 듯 살아가보지만 다 부질 없었던 것임을 알고 떠나기로 했던 것.



엔딩을 끝으로 극장 내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점차 일어서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난 엔딩 크레딧이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저도 모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날 움직이게 만든 건 누군가의 손. 그 손은, 백건의 손이였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서야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건이가 손을 놓았고 난 어설프게 웃으며 변명같은 말을 내뱉었다.

" 미안. 잠시 멍 때리고 있었어. "
" .... 그래? 난 네가 내 저녁값 걱정하는 줄 알았지. "

저, 저녁값. 고기만 드신다는 저 백건의 입맛을 어떻게 만족시켜야 하는 지에 대한 걱정에 작게 한숨 쉬며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저녁이였고 금요일 저녁이라 거리에 사람은 많았다. 저녁의 차가움을 담은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아 이 시간대에 이렇게 밖에 나와있는 것도 오랜만이네.

" 우리, 가람이한테 혼나겠지? "

외식은 금지! 라며 살벌하게 우리에게 경고했던 가람이가 문득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진짜 혼나겠다. 오늘 저녁메뉴는 뭐였을까? 카레는 이미 속세의 맛에 길들여진 현우가 다 먹었겠고 그에 가람이는 현우 뱃속 거지를 없애겠다며 굶기진 않았을까. 평소엔 들지도 않을 생각이 왜 이렇게 많이 드는건지 신기할 따름이였다. 화를 내든 말든 생각만 해도 귀가 울릴 것 같다며 질색하는 백건이 지금 내 옆에서 같이 나와 놀러 나왔다는 사실도.



" 아. 귀엽다. "

내 눈에 들어온 건 악세사리숍 앞에 배치되어 있는 인형 하나. 내가 집어올린 건 호랑이 인형. 뽀얀 인공털에 분홍색 코 그리고 반짝이는 까만눈알. 귀엽다. 내가 집어들고서 백건을 힐끔 쳐다보니 내 머리통을 잡는다. 악! 미안! 너도 호랑이긴 하잖아! 라며 버둥대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자니 우리에게 여자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왔다. 무슨일인가 하고 바라보니 난처한 표정. 너무 시끄러웠나?


" 손님. 죄송한데 그, 인형 불량품입니다. 실수로 잘못 나온 것 같네요. 바뀌드릴... "

" 아뇨, 이거 주세요. "


내가 말을 끊고 돈을 내밀었다. 직원은 네? 라는 표정이였고 날 쳐다보는 백건의 시선도 느껴졌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돈을 내밀었다. 직원은 그럼, 손님 그냥 가지세요. 버릴 예정이였으니까.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고 품 안에 쏙 안기는 이 귀여운 호랑이 인형을 살짝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가게를 벗어나왔다. 난 처진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며 백건을 돌아봤다. 그리고 내 인형이 붕 뜬다?

" 야 내 인형이야. 왜 가져가? "

백건이 그 인형을 한 손으로 집어든 것. 내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니 그 인형을 자기 얼굴 옆에 가져댄다. 귀여운 호랑이 얼굴과 새삼봐도 잘생겼지만 나 잘났다 를 얼굴에 새겨놓은 백건의 얼굴. 뭐야, 왜 이래?

" 얘도 호랑이라며. 그럼 내거야. "
" ..그렇게 가지고 싶었어? 내가 멀쩡한 거 하나 사줄게. 이리 줘. "
" 싫어. "

무슨! 진짜 이건 말이 안되잖아. 그런 불량품을 가져서 뭘 하려고. 그저 잘못 만들어져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그런. 잠시 울컥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평소처럼 반응하지 못하자 침묵이 흘렀다.

" 야. 주은찬 우냐? "
" 안, 울어. 누가 울어. "

눈치 하나 기똥차게 빠른 녀석. 진짜 울지는 않았다. 금세 얼굴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드니 녀석은 여전히 날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아 이런 침묵 어색해. 내가 바보였던 거지. 왜 눈치없게 울컥해선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거야. 평소처럼 웃어야하는데.

" 불량품? 그냥 인형인데 무슨 상관이야."

넌 참 신기한 사람이야. 내 모든 옹졸한 마음을 쉽게 알아차리고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날. 난 널 만난 자체가 내게 최고의 행운이였다고 생각해.

" 그래, 인형이지. 그 인형은 내가 선물로 줄게,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게 어때? 푸하하하. 자 가자. 이제 어디로 가볼까? "

내 말에 뭐? 하고 피식 웃어보인다. 그렇게 내 지갑이 정말로 거덜났던 고기저녁, 몸 좀 푼다고 들어갔던 게임장의 게임기계를 박살내서 녀석의 골드카드로 뻔뻔하게 해결했고 부를 노래가 있으려나 들어갔던 노래방에서 어린시절 녀석에게 많이 놀림받았던 날아오르라 주작이여를 홀로 열창하고 백건이 탬버린을 웃음을 참으며 쳐주며 우리는 꽤 재밌게 놀았다.

몸은 피곤하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치는 기분. 백건, 이녀석은 그다지 상관 없어보이는 듯 했다. 웃겼던 점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호랑이 인형일까. 돌아가는 길에 나는 백건에게 말을 꺼냈다.

" 나 사실, 오늘 우리 집에 돌아가봐야 해. 내일 주말이니까 학교는 상관 없겠고 할머니와 애들한테 잘 말해줘. "

난 한참 걸어야 시외버스가 보일 것 같으니 이제 여기서 헤어지자. 조금만 더 걸어가면 중앙이잖아? 밤길이 무서우면 호랑이 인형이 있으니 괜찮을거고 그리고. 말 하는 중간에 목이 컬컬해진 기분이라 큼큼 거리며 목을 풀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집에 좀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 연락해줄테니까 나 없다고 울지말고 응? 끝 말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그래. "

좋아. 난 뒤돌아섰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먼저 중앙 쪽으로 걸음을 걷고 있는 백건의 뒷모습.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왠지 흐릿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달콤한 꿈은 여기까지야. 주은찬.



난 길을 걷고 걸어 이제는 꽤 한산해진 시내거리를 바라보다 방향을 틀어 지하철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씩 내려가는 계단이 참으로 낯설고 싫은건지 알 수가 없다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 내부 복도를 걸어 교통카드를 찍어 입구를 지나 드디어 지하철을 타는 곳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 곧 열차가 들어온다는 알림에 입구쪽에 가까이 걸어갔다.

내 마지막은 이토록 외로운거구나. 머리속은 싸늘하게 식었다. 저 끝에서 불빛이 보였다. 죽는 게 두렵지는 않아. 입고 있던 교복을 단정히 했다. 한 발만 떼면 떨어질 것 같은 가파른 곳에 섰다. 있잖아, 건아. 사실말이야 난 죽고 싶지도 않았어.

지하철의 불빛이 내 눈을 찌르듯 시야를 덮었을 때 발을 떼고 몸을 앞으로 던졌다.



" 주은찬!!! "

아니 앞으로 던지려고 했다. 뒤에서 날 끌어당기는 손만 아니였다면. 그 손에 이끌려져 몸의 중심을 잃고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 눈물 범벅인 내 얼굴을 너무도 무섭게 내려다 보고 있는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아, 이제 어떻게 하지. 네 얼굴을 보면 살고 싶어질 게 뻔해서 일부러 헤어졌는데 넌 왜 여기 있는거야? 건아.

" 너 미쳤어? "
" 아니. "
" 네가 죽고 새로운 주작년이 태어나면 다 좋아질거라 생각했냐? "
"...!! 어떻게. "

[ 이러다 우리 집안에 흠집이 나면 어쩌려고 저딴 게 태어난 건지.]

그래, 맞아. 사실, 난 너무 지쳐있었어. 이젠 내가 살아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져서, 정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어도 좋은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이런 방법을 선택했어. 내가 없으면 다들 행복해질테니까.

[ 은찬아. 넌 왜 남자로 태어나선..쯧. ]

죄송해요, 이 한마디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져버렸고 난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어. 그래서 너와 함께 수련하면서 이 양기가 넘치는 몸으로 주술을 터득하고 중앙에 가서 열심히 수련했지. 그래, 난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 콱 사고로 죽어버려. 너 같은 불량품을 중앙에 보낸 것도 수치스러운데 ,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지. 안 그래? ]

다들 나더러 없어지래. 그게 행복한 길이래.

건이 날 끌어안았다. 품이 너무 따뜻해서, 네 품은 마치 넌 살아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네가 날 걱정해주는 것 같아서 좋은 걸 넌 알고있을까?

" 주은찬 이 바보 머저리야. 넌 하늘이 선택한 주작 후계자고, 내 소꿉친구고, 내가. "

끌어안은 상태에서 몸을 떼 넌 아직도 흐르는 눈물때문에 엉망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며 눈물을 닦았다. 건이는 내 손을 붙잡고선 내게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한 채 놀라서 멈춰있는 날 보며 또박또박 확실히 들려주었다.

"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 "

네가 잡은 손의 감각이 너무나 뜨거워, 네가 내게 전해준 감정이 너무 기꺼워 난 건이의 품에 기대 더 울고 말았다. 고마워. 정말 좋아해 라는 나의 외침이 묻힐 정도로.

[백건은찬] 속죄

카테고리 없음 2014. 9. 29. 21:46

" 주은찬! 그만해. "

백건이 나를 불렀다. 아냐, 이 정도쯤은 괜찮아. 지금 가람이를 위협하는 이무기만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 중에 가장 강한 가람이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저 '이무기'는 우리에게 '독'이라는 걸. 아직 미숙한 우리로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우리 누나를 나에게서 앗아간 그 순간부터 내 안의 악몽과 두려움의 존재, 그리고 유일한 '증오'의 존재.


" 가람아. 잠시만. "
" 주은찬. 네가 가면 더 위험해. 가지마! "


가람이의 무심한 듯 날 걱정해주는 목소리. 가람이를 보니 이무기를 견제하느라 지쳐 보였다. 너와 여기의 모두를 잃고 싶지 않아. 어깨를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왠지 불안한 표정의 백건이 날 끌어안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놀랐지만, 그 따뜻한 체온에 웃음 짓고 말았다.
성격 정말 안 좋다니까. 애써 다잡은 마음 흔들리게 하고 있어. 사실 좀 무섭기도 해. 내가 그 '주술' 을 쓰면 내 몸이 버틸 수 있을지 나조
차도 모르는걸.

" 주은찬. 너 그 '주술'을 쓰려는 속셈이지? 쓰지 마. 그걸 쓰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주제에, 뭘 쓰겠다고? "


주작가문에서 전해오는 금단의 주술. 보통은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여자 몸의 음기가 그것을 방해한다. 금해질 정도로 위험했지만, 그걸 쓸 수 있는 주작 후계자는 여태껏 없었다. 하지만 주은찬, 남자 주작 후계자. 쓸 수 있는 후계자가 나타나 버렸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아침에 슬그머니 일어나 가람 이의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기지개를 켜 옆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있는 현우를 깨워 같이 거실로 나가면 벌써 편한 의상으로 식당의 메인 석을 차지하고 있는 백건, 현우는 비몽사몽에도 불구하고 백호 공자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건 아주 부당한 짓입니다! 라며 소리 질렀고 시끄러워라며 음식 접시를 가져오는 가람이.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자자, 다들 밥 먹자!라고 말을 꺼낸다. 그 시간을 원한다. 그 시간을 지키고 싶어. 모두를 지키고 싶어.


" 이걸로 죽지는 않아. "


숨을 가다듬었다. 이무기의 번들번들한 눈을 보았다. 네 녀석으로 내 모든 걸 잃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누나의 살려달라는 손을 잡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그 비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난 행복할 자격이 없어. 누나 대신, 이 삶을 이어나가는 게 내 속죄야. 이무기 같은 걸로 내 속죄를 방해하게 놔둘 것 같아?


" 시화(時火) "


백건의 고함도, 현우의 경악한 모습도, 가람이의 주먹을 꼭 쥐는 모습이 한순간 내 눈앞에 흐릿하게나마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주은찬이 처음 보는 주술, 주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공격으로 한 번으로 그 죽을 것 같지도 않던 이무기가 쓰러졌다. 사신강림은 아녔다, 하지만 그 공격을 하는 주은찬은 정말 생전 처음 보는 남인 마냥 차갑고 무기질 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자신의 몸을 누구에게 맡긴 듯 자연스럽고 맹렬하게 이무기를 공격했다. 중앙 전체를 덮을 듯 엄청난 불꽃. 그 이후는 흩날리는 재가 눈앞에서 떠다녔고 매운 눈과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려운 매캐한 연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바로 주은찬에게 뛰어갔다.


" 주은찬, 넌 언제 깨어날 거야? "


비겁해. 그렇게 편안한 얼굴이면서, 자는 얼굴로 일어나 내게 잘 잤어, 백건?'이라고 말해줄 것만 같은데, 늘어져 있는 손을 잡았다. 그렇게 깨어나기 싫은 표정으로 말해봐도 난 널 기다릴 거다.

가람찬 심술- c

카테고리 없음 2014. 9. 26. 22:11

으아앙. 아이의 울음 소리.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 앉았다. 설마, 꼬맹이가 내가 보지 못 한새에 어딘가 심하게 다쳐 울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안 좋은 생각이 들이닥쳐 내 머리 안을 뒤죽박죽 뒤섞었다. 어디야. 어디야 꼬맹아. 급히 놀이터 안 쪽으로 달려가니 그 붉은색 머리칼이 저 멀리 서 있었다. 뒤돌아서 있는 모습에 또 안절부절해지는 기분.

" 꼬맹이! "

점점 가까이 다가섰을 땐 나는 울고 있는 아이가 이 꼬맹이가 아니라 다른 꼬마라는 걸 발견했다. 내가 부르자 뒤돌아선 꼬맹이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건데? 뛰어온 탓에 살짝 숨이 거칠어져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꼬맹이가 울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래, 나와 함께였는데도 꼬맹이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면 얘네 부모님과 엄마가 걱정하실테니, 그래서 내가 혼나기 싫어서 이 녀석이 신경쓰이는 것 뿐이야. 그뿐이야.

" 놀이터에 먼저 와보니 울고있어서.."

울고있어서, 그래서? 왜 자꾸 뜸을 들이는거지.
그제서야 꼬맹이의 손에 있어야 할 로봇인형이 아직도 훌쩍이는 꼬마의 손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파악은 쉬웠다. 꼬맹이가 저 울고 있는 꼬마를 발견하고 달래주다가 ' 자, 이거 줄테니까 울지 마. '라는 말이나 지껄였겠지. 그에 저 꼬마는 꼬맹이가 얼마나 저 인형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좋아서 냉큼 저 로봇인형을 받았겠지.

" 왜 멋대로 줘버려? 내가 선물한걸. "

나도 모르게 삐딱하게 대해버린다. 내 조용한 물음에 입술을 꾹 다무는 얼굴을난 아무 말 없이 내려보았다. 그 행동을 번복할 의향은 없다 이거지. 한숨이 나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그치는 내가 싫겠지?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꼬맹이는 흔히 교과서에 나올법한 착한 행동을 했다. 우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달랜다,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착한 어린이의 모범상이 아닌가. 하지만 난 이 꼬맹이를 보고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지 않았다.

" 난 저 벤치에 앉아있을테니까 적당히 놀다 와. "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쓸어주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선 돌아서서 벤치로 걸어갔다. 청가람, 성질 한 번 엄청 더럽다. 라고 자조하며. 벤치에 앉아 꼬맹이를 찾으니 아까 달래준 꼬마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 난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 하나가 저 꼬맹이 주은,찬이라고 했나 저 주은찬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귀찮은 꼬맹이가 아니였다. 저게 어떻게 보통 꼬맹이야?

새삼 더워짐을 느꼈다. 아까 점심을 먹고 있는 걸 봤으니 지금이. 일상의 나였다면, 지금쯤 선풍기를 틀어놓고 폰을 만지고 있었겠지. 아까 꼬맹일 본 이후로 폰을 한번도 만진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주머니에 넣은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2시 20분. 한참 더울때네.

아직도 잘 노네. 아, 풍선을 들고 있는 여자애도 끼었다. 원래 저 땐 저렇구나. 뭐 아직도 같은 반에는 첫 만남에 10년 넘은 친구처럼 구는 애들도 있으니 저 정도는 보통인가. 주머니를 뒤적이다. 아까 같이 맛있는 거나 사 먹으라고 한 지폐가 나왔다. 만 원.


이제는 모래로 탑쌓기를 하고 있네. 잠깐동안 자리를 비어도 잘 놀고 있겠지.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 꽤 가까웠으니 달려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와서 다시 얘기해보자. 내가 어느새 저 꼬맹이와의 관계를 잃기 싫다는 걸 알아버렸다. 겨우 1시간 남짓, 넌 남에게 무심했던 내게 어떤 마법을 부린걸까. 은찬아.

난 슬슬 일어서 잘 놀고 있는 모습을 눈에 새기고선 놀이터 밖으로 뛰어갔다.

" 6000원입니다. "

콘 4개. 취향을 맞춰줄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기에 손에 집히는대로 집어들어 올려놓으니 알바생이 가격을 불렀다. 돈을 주고 봉지를 집어들고 편의점 문을 열어 아직 뜨거운 햇살을 마주하며 내가 없다고 찾고 있진 않겠지 라며 조금 조급해지는 마음.

7분, 딱 7분이다. 그 꼬맹이는 장난 같은거 안 부리니까 괜찮은게 당연하잖, 까지 생각했을 때 꼬맹이가 놀던 그 자리에 아이들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시발. 욕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진정해. 또 어디가서 놀고 있는거겠지, 가서 또 꾸지람을 주면 미안하다 말하며 내게 웃어줄거야.

옷을 당기는 느낌에 재빨리 돌아보니 아까, 풍선을 들고 있었던 여자애. 나와 눈이 마주지자 히익. 놀란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불안하고 어쩔줄 모르는 듯 자꾸만 다른 쪽을 주시하며 나를 본다.

" 은, 은찬이가 나무에서 떨어져서...눈을..눈을 안떠요..흐윽..."

울음을 터트리며 어떤 나무 쪽을 가리키는 여자애. 그리고 내 손을 벗어난 이미 녹았을지도 모르는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 그런것들을 신경쓸 새는 없었다.

팔 뼈가 부러졌단다. 놀라 뛰어간 그 장소에는 아이들 몇이 보였다. 그 사이에 쓰러져있었던 꼬맹이도. 바로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정말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축 늘어진 꼬맹일 끌어안고 주변에 서 있었던 애들 중 한명에게 이게 뭐냐고, 무슨 일이냐고 무섭게 다그쳤다.


"..가람아? 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니. 은찬이 때문이라면 사고니까, 금방 깨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 괜찮아."

어머니의 위로. 정신이 드는 기분에 어머니를 보며 끄덕였다. 내 앞에는 팔이 부러지고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병원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고 있는 꼬맹이가 누워있었다. 또 멍해지는 기분. 어머니의 '이런.'하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꼬맹이만 눈에 보였다.

[ 형이 사라진 후에, 은찬이가 같이 놀지를 않고 계속 놀이터 입구만 쳐다봐서 저희 중 한명이 왜 그러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은친이가 저 형은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했는데 또 자기가 못나서 형이 자기를 버렸다고 웃으며 말해줬어요 ]

" 엄마. "

갑자기 내가 물어서 그런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불렀냐는 표정을 지으신다.

" 이 녀석, 입양아야? "

어머. 엄마의 작은 놀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시기에 난 모르겠다고, 모르겠으니 설명해달라 부탁드렸다. 엄마의 난처한 표정. 그리고 이어지는 주은찬의 비밀. 이 아이, 은찬이는 자신의 친구(은찬의 양어머니)가 고아원에서 입양했다고, 아이가 친부모한테 꽤 모질게 키워지다가 버려졌다고, 그것 때문에 지금 부모한테도 항상 조심스러워해 고민이라 들었다 말해주셨다. 엄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 말하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래, 그래서 넌 나같은 녀석의 애정을 받고 싶어했니. 내가 왜 그런 말들을 네게 했던걸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져 정리했다.

"..네가 좋아. 싫어하는 게 아냐. 널 위하지 않는 널 보며 괜히 어린애처럼 심술 부렸던 것 뿐이야. 정말이야. 주은찬. "

[ 방금 형한테 간 여자애가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이 날라가서 은찬이가 그걸 잡겠다고 올라가려던 걸 우리가 막았어요. 근데 은찬이가 저흴 보면서 혹시, 혹시 이런 착한 일을 하면 형이 돌아오지 않을까? 라며 말릴틈도 없이 달려가버려서 ]

비가 내렸다. 창문에 빗방울이 주륵, 주륵 흘러내려 밖을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렸다. 어서 일어나. 네가 너무 착해서 착해빠진 꼬맹이라서 이렇게.

" 이렇게 네 곁으로 다시 돌아왔잖아. "

가람찬 심술-b

카테고리 없음 2014. 9. 25. 22:52
툭. 떼구르르. 통!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파트 주변 문구사까지 걸어나왔다. 꼬맹이가 열심히 나를 따라 걷던 걸음속도를 줄이더니 어딘가를 응시했다. 뭐지? 꼬맹이의 시선을 따라 보이는 것은.

"뽑기 하고싶어?"

이미 아이들 몇 명이 옹기종기 달라붙어 동전을 집어넣고 장난감이나 다른 무언가를 담고있는 알 모양의 플라스틱이 나오는 뽑기기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꼬맹이 너도 저런 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내 질문에 깜짝 놀라 날 바라보는 꼬맹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엄청 하고싶구나, 라고 느낀 이유가 이미 그 얼굴에 뽑기를 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표정이여서였다.

"...아니. 괜찮아! 형. 얼른 그네타러 가자."

뭐? 거짓말. 난 꼬맹이의 대답을 듣고 왠지모를 짜증이 나버렸다. 얼굴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주제에 뭘 괜찮다고? 내가 얼굴을 찡그리니 저 녀석은 내게 더 웃어보인다. 헤실 웃는 그 얼굴을 보니 더 답답한 기분.

" 이 형이 사줄게. 딴 말 금지. "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작은 손. 따뜻함을 품은 그 손을 잡고 뽑기기계로 다가갔다. 이거 하나 뽑는 게 뭐가 어려운데! 흘끗 뒤를 돌아보니 꼬맹이는 어? 어어? 라고 말하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였다. 그리고 내 착각인진 모르겠지만 그 작은 얼굴에 기대하지도 않은 선물보따리를 받은 행복한 얼떨떨함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주머니를 뒤적여 나오는 동전 500원 하나를 꼬맹이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내게 받은 500원을 받을 때 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내게 활짝 웃어보이고서 뽑기기계에 동전을 넣고 돌리는 버튼을 돌렸다.

데구르르. 통.
기계 출구로 나온 건 빨간색 알. 조그만 손으로 끙 힘을 주더니 그 알을 열어버린다. 고개를 빼 그 안에 나온 걸 봤는데, 잘은 모르지만 티비 어디선가 방영했던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로봇이라는 걸 알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뒷통수밖에 안보이지만 조심스럽게 그 로봇인형을 빼내는 손길은 정말 조심스러운 것이여서 난 말로 듣지 않아도 이 꼬맹이가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껴졌다.

만지작. 만지작. 근처 놀이터로 향하는 길가를 걷는데 어째 조용하다 싶었더니 꼬맹이가 걷고 있는 길 앞도 보지 않은 채 그 인형만 만지작대는 게 아닌가.

" 그러다 넘어지면 아야 해. 놀이터 가서 만져. 그리고 그게 그렇게 좋아? "
" 응! "

허. 진짜 안 뽑았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었겠네 싶을정도로 바로 대답하는 꼬맹이. 나도 이 때 이런 걸 좋아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모습이 진짜 어린애다워 보였다. 원래 애들은 질색수준이였지만. 뭐, 이 꼬맹이는 조용해서 괜찮은 것 같기도, 라고 생각하며 꼬맹이의 한 손을 잡았다. 응? 하는 눈빛. 아까 들은 건 까먹었냐?

" 넘어질 것 같아. 그 짧은 다리로 넘어지긴 싫지? "

아. 짧은 다리란 표현은 너무 했나. 이미 뱉어진 말이였기에 도로 주워담을 순 없는 걸 알아서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어째 이 붉은색 머리카락이 인상깊은 꼬맹이에겐 신경이 쓰인다. 왜 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꼬맹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꼬맹이는 날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형은 내가 좋아?"

무슨. 난 꼬맹이의 장난스러움도 웃음기도 없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음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여자애가 할 법한 질문을 이런 남자애가 내게 한다는 것에 물론 저 자신도 이성이라던가, 좋아한다는 거에 그닥 잘 알지는 못 했지만 이 녀석의 성 정체성에 대해 너랑 나랑은 같은 남자라 서로 좋아한다는 게 안 돼, 같은 교육을 시켜줘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아, 지금 나는 왜 이렇게 이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느낌인건지. 후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 같은 꼬맹일 좋아하겠냐. 어? "

진정됨을 느끼며 툭 내뱉은 한 마디. 곧바로 꼬맹이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꼬맹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걸 보았기 때문. 곧 그 표정이 사라지고 내가 지금 본게 제대로 본건지 애매하게 생각 될 정도로 꼬맹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 응. 장난이지. 형은 그런 것도 몰라? "

그렇게 말하고선, 종종걸음으로 날 앞서가 벌써 코 앞에 있는 놀이터로 달려가버렸다. 내 손도 놓아버린 채. 아까, 그 울 것같은 표정은 뭐였고 그것에 기분이 나빴다면 왜 저 꼬맹이는 웃었을까. 눈으로 꼬맹이를 주시하면서 천천히 걷다가 그 손의 따뜻함이 사라졌다는게 새삼 느껴져 왼쪽 손을 응시하다 이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선 발걸음을 빨리해 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놀이터로 금새 사라진 꼬맹이의 꽤나 동그랬던 붉은색 머리통을 찾아나섰다.

가람찬 심술 - a

카테고리 없음 2014. 9. 25. 00:09
심술이었다. 엄마는 아직 날 혼자 두고 집을 나서기 신경쓰이신다며 손을 잡고 도착한 다른 사람의 집에 와 생전 처음 본 너에게 내가 부렸던 이상한 심술. 붉은 머리색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맹이, 날 보며 주춤주춤 다가와 처음보는 형이네? 라며 손을 내밀며 반갑게 웃던 꼬맹이. 초등학생쯤 되려나. 초등학생다운 티셔츠와 단색 반바지차림. 그때까지는 이 꼬맹이가 다른 애들처럼 그 나이대에 맞게 가지고 싶은 걸 못 가지면 떼를 쓰는 등의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을 더 챙기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 어머. 가람아, 밖에 은찬이랑 같이 나가서 애들 좀 봐주지 않을래? "

싫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원체 남을 대하는 자체가 귀찮은 자신인데, 애들이라고 오죽할까. 하지만 엄마 앞에선 딱히 반항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음엔 이런 곳 따라오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하며 내 옆에 어느새 다가온건지 신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이 주은찬이라는 꼬맹이를 내려다보았다.

" 밖에 나가는 게 그렇게 좋아? "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도중 아직도 미소를 짓고있는 꼬맹이에게 물었다가 아차, 했다. 예전에 돌본 적이 있던 사촌동생 녀석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가 온갖 난해한 용어들과 갖가지 흥분이 섞인 감탄사로 도배된 대답을 받기부터 시작해 형은 이거 알아? 이거 짱 재밌다며 내 손을 질질끌고 내 몸을 혹사시키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응?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게 미리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마. 대답 안 해도 돼. 우리 아직 어색한 사이잖아? 그렇게 속으로 질색을 하는 내게 돌아온 건 꼬맹이의 한 마디.

" 형이랑 같이 놀러가는 게 좋아. 처음이잖아? "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내게 호들갑도, 짜증도, 지루함도 아닌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온전히 기쁘다는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어딘가 내 한 쪽을 울린 것 같다고 생각한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람찬(미완)

카테고리 없음 2014. 9. 20. 21:08
" 청가람? "

내가 알던 누군가와 닮은 모습. 조금 키가 컸다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 서 오던 게 어느새 근처까지 와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 조금 내가 알던 앳된 얼굴과 달리 성숙한 느낌. 저도 모르게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아.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치켜뜨며 내게 다가온다. 어? 나보다 키가 크다. 더욱 가까이 본 얼굴은 정말 내가 알던 창가람의 얼굴이어서 놀
갔다. 사람아, 너 형제 있었니?


" 불렀으면 말을 하시죠. "

" 어? 진짜 사람이야? "


진짜 사람이? 네가 여기 있는 자체가 내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분명 중앙에서, 아니 거부를 하긴 했지만 결국 사신후계자임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청룡이 된 네가 왜 이런 시내 한복판에.


" 현 우가 속세의 음식에 미쳐서 사 달라고 발광했어?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

" 현, 우. 그건 또 뭐고 당신은 날 알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