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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은찬]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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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4. 14:40
백건이 기억을 잃었다. 날 알아보지 못 한다. 오히려, 날 피하기까지 한다. 답답한 숨을 들이마셨다.
"안녕, 백건."
"....."
흘깃 쳐다보고선 날 지나쳐 간다. 난 날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지었던 웃음을 멈추었다. 답답해. 나 답지 않은 짜증섞인 속마음에 한숨을 지었다.
"주은찬. 밥 먹어."
방문틀에 드러누워 새 하얀 구름들을 감상하고 있던 와중에 청룡 가람이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가람이의 밥은 맛있었다. 그 입맛 까다롭다는 백건의 입에 맞을정도로.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이 날 살짝 흔들었다. 날씨는 한숨이 나올정도로 좋았다. 나와는 다르게.
밥상에 앉아 맛있는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씹고 있다가 앞에 앉아있는 백건을 흘깃 쳐다보았다. 방금 와서 앉아서 그런지 다들 이 녀석이 식사를 시작하지 않은 걸 모르는 눈치다. 손을 뻗어 고기접시를 들어 백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모두 날 쳐다본다. 부담스럽게 뭘 보냐고, 실실 웃었다. 백건이 날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곧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어들어 먹는 백건의 모습을 보고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게 기회라는 게 아닐까. 혹은 하늘이 내게 내리는 벌. 같은 사신주제에, 남자주제에 너를 마음에 둔 죄에 대한.
꽤나 깊어진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백건이 나타난 그 날 부터, 쭉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눈을 감아보아도 수면의 늪에 빠질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고싶어 누구도 깨어있지 않는 시각이 되면
마루로 조심스레 나가 달을 찾았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라고. 네게 남은 희망같은 건 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지, 이런 핑계같은 생각조차도 널 생각할 구실이라는게.
그래, 나는 솔직한 사람이 아니였다. 그 누구처럼 마음 속 한마디를 쉽게 꺼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겁쟁이, 나는 겁쟁이였다.
무릎을 감싸 안았다.
중앙, 이 곳에 오기 전 나는 너의 연락을 피했다. 시간을 두고 널 멀리하자고, 어린시절 너희집에 널 보러 부지런하게 걸음을 재촉하던 어린 날 붙잡아 가지 못하게 해버리자고 그렇게 이 마음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너, 안 자나?"
움츠렸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네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밤, 오로지 달빛만이 세상을 비추고, 널 비추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습관처럼 웃었다. 실실웃는 날 보던 넌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또 바보같은 심장은 네 존재에 더욱 두근거리고 있었고 난 그 두근거림을 숨기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 잊어버린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하나, 평소의 너라면 이토록 이상하게 행동하는 나에게 "너 뭐 잘못 먹었냐?" 라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내겠지. 그래.
"너, 날 알고 있다고 했지?"
부드럽지는 않지만 충분히 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 몸을 움츠려 무릎을 더욱 더 감싸안으며 작게 "응. 그런데?" 라고 답해주었다.
"그럼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가르쳐 줘."
사람? 누군가 기억나려는건가. 난 끄덕였고 백건은 그 사납지만 지금은 지극히 조용한 눈매를 한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나타나 내 앞에서 웃어줬으면 하는 사람."
어조는 잔잔했다. 다만 그 말을 하는 백건의 눈동자는 굉장히 집요한 사람의 그것이여서 난 조금 놀랐다. 지금 백건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사람이 백건에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렸다.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겼구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슴이 지끈거렸다.
지금 내 표정, 이상하진 않을까? 습관처럼 지었던 웃음이 제발 어색하지 않기를 바라며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것 말곤? 한 가지로는 잘 모르겠는데."
내 대답에 녀석은 날 보던 시선은 거두고 이제는 달을 향해 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샌가 그 옆모습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나는 네 얼굴을 바라보다 눈동자만 움직여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넌 그걸 알고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네 그 눈빛은 내 숨겨진 그 마음 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을.
"잡고 싶어도, 계속 잡을 수가 없는 사람. 내게 저 '달' 같이 언제나 그 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어린시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너는 내 질문에 걷던 걸음을 멈춰서선, 날 보며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바보]
그 당시에는 그게 내가 한 질문의 쓸데없음을 비난하고자 내게 던진 귀찮음을 담은 한 마디인 줄 알고 실실 웃으며 그런 농담은 이제 너무 많이 들었다며 먼저 저 만큼 걸어가버린 녀석을 쫓아갔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내가 내 마음을 자각할 시기즈음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단어 하나가 불연듯 내 머리속에 숨어지내다 나타났다는게, 난 네 모든 걸 기억하고 생각하려 했다는 것을.. 아니 난 빼도박도 못 하게 널 좋아하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바보."
"... 뭐?"
"네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 준 좋아하는 사람이랬어, '바보'가 ."
아닐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 사람을 찾지 않았으면 하는 내 조그만 심술.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그걸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야? 아려오는 가슴에 이제 난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도망치자. 그래, 얼른 너에게서 도망치자. 침을 삼켰다. 네가 무엇을 더 말하기 전에, 네가 내게 더 비참함을 안겨주기전에 이제 들어갈거라고 너도 얼른 자라고 말하자.
"그럴지도 모르겠네. 바보."
조금 즐거운 듯한 음색으로 내게 그 어린날의 그 때처럼 너는 바보가 좋다고 말한다.
▶
"야, 바보 주은찬. 거기 쓰러져있으면 쓰레기수거함이 주워간다? 일어나."
무지막지한 녀석. 이마에 난 혹이 아렸다. 여유롭게 내 이름을 부르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백건의 기억이 돌아왔다.
녀석의 기억이 돌아오던, 돌아오지 않던 내 불면증은 고쳐지질 않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녀석은 이제 나를 없는사람 취급도, 싫어하는 내색을 내보이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내가 걱정했던 그런 날이 와 버렸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집중 할 수 없는데. 아직 나는 이 마음의 한 자락도 끝내질 못 했는데. 더 커져만 가는데.
"바보 주은찬."
".. 어? 안 자고 왜 깨어있어?"
"네가 할 말이냐."
그 때 이후로 마루에는 아주, 아주 늦은밤에만 나왔었다. 그것도 매우 드믈게. 그래서 밤에 그 녀석이랑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근데, 오늘 만나버렸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요새 상당히 거슬리는 한 가지를 떠올리며 녀석을 불렀다.
"야. 백건."
"왜? 바보 주은찬."
또.
"왜 내 이름앞에 바보를 넣는거야? 진짜 바보의 저력을 보고싶은거냐."
바보,바보,바보. 기억이 돌아 온 그 순간부터 계속 바보라고 부른다. 이쯤되면 고의로 부르는게 틀림 없었다. 녀석은 내 질문에 피식 웃었다. 달빛이 만들어낸 얼굴의 음영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평소의 메마른 웃음이 아닌 무언가를 담은 부드러운 웃음이라는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보 맞는데. 바보 주은찬. 네가 말한것도 잊어먹냐?"
"내가 말한...."
그 때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기억나는 한 장면.
["네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 준 좋아하는 사람이랬어, '바보'가 ."]